일본 방송국 TBS는 올해 초 '불꽃체육회(원제: 炎の体育会)'라는 새로운 스포츠버라이어티쇼를 방영한 바 있습니다. 정규 편성된 프로그램은 아니고, 분기에 한 번 꼴로 특별 편성하는 이 프로그램은 여성 스포츠 선수들과 남자 연예인들의 리얼 성대결을 모토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방송에서는 슛복싱의 RENA 선수와 격투기 경험을 가진 남자 연예인 3명의 대결로 큰 관심을 모았죠.

물론 이런 남녀 성대결은 기존 일본 예능에서 꽤 자주 보아왔던 것이며, 국내에서도 가끔 시도해온 바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프로레슬러들이 등장하거나 일종의 핸디캡 룰을 적용해 코믹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집중한 반면, 이 '불꽃체육회'는 그야말로 '진검승부'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난 회에 RENA와 함께 종합격투기 부분에 출연했던 브라질유술의 대표 키라 그레이시는 단순한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시범 비슷한 경기인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연했다가, 상대 남성(유도 유단자)이 진심으로 덤비자 매우 놀라고 화가 나서 본인도 전력을 다해 기술을 걸었다는 후일담을 밝힌 바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RENA 선수는 3분 1R 씩 남성 3명을 차례로 상대하며 몇 차례 다운을 뺏는 등 '여자는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편견을 시원하게 깨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지요.


'불꽃운동회'에 출연한 RENA의 경기 모습


그리고 지난주 토요일 방영된 '불꽃체육회2'에서는 우리나라의 임수정 선수와 브라질 종합격투기 선수이자 스트라이크포스 여자 챔피언인 크리스 사이보그가 출연했습니다. 특히 임수정은 K-1 무대를 통해 RENA에게 한 차례 이긴 바 있기 때문에 '한국의 슛복싱 퀸'이라는 별명으로 소개가 됐고, 역시 남자 코메디언 3명과 차례로 슛복싱 룰로 대결을 했습니다.

그런데 방송이 나간 후 약간의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첫 상대였던 카스가 토시아키가 비록  코메디언이기는 하지만 2007년 K-1 일본 트라이아웃에 출전한 바 있는 '선수급'의 실력자인데다가, 임수정보다 무려 30kg 가까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30kg이면 일반적인 격투기 경기에서라면 4~5체급 이상의 체급차에 해당하는 엄청난 체중 차이죠.

게다가 카스가 토시아키를 비롯해 다른 두 명의 코메디언들 또한 이번 대결을 앞두고는 주5일 훈련에 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전업선수들 외에 주5일 훈련을 하는 일은 거의 없죠. 대부분 일반인들은 주 1~2회, 많아야 3회 정도가 고작입니다.

이는 RENA 때 상대 남성, 특히 첫 상대가 상당히 왜소한 체격의 남성이었음을 고려하면 다분히 고의적으로 임수정 선수를 힘들게 하려는 것 이상의 의도를 가졌던 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현지에서도 이런 비상식적인 매치업에 대해 '아무리 예능이고 선수나 슛복싱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 임수정이 가여웠다.'라는 반응이 빗발쳤다고 하는데요. 한 격투기 기자는 트위터를 통해 "이번 대결은 임수정에게 '재난'이었다"라고까지 평했습니다.



임수정의 경기 모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수정은 힘겹게나마 3라운드 경기를 무사히 마쳤고, 남성 코메디언 3인과의 성대결은 판정 무승부로 마무리됐습니다. 특히 상당한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자기 스타일인 정면승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비록 뒤끝이 깨끗하지 않은 느낌이긴 하지만, 이또한 하나의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해나가야 할 기술적/정신적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불어 종합격투기 부문에 참전한 크리스 사이보그는 지난 번 키라 그레이시와는 달리 (키라는 종합격투기로 출전했지만 실제로는 그래플링 매치를 했죠) 제대로 종합격투기 경기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상대는 역시 코메디언인 야기 마스미로 유도 1단, 극진공수 2단의 격투기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영상 또한 상당히 기대가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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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류운

스포츠 뉴스에서 곧잘 제목에 달리곤 하는 '신승'이란 말은 매울辛에 이길勝, 즉 매우 힘들게 겨우 이긴다는 뜻인데요. 오늘 K-1 최초의 여성매치로 관심을 모았던 임수정 대 레나의 경기에서 임수정의 승리에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스타일 상에서는 두 선수 모두 정면승부를 거는 타입이라 꽤나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준 끝에 전적이나 경험 면에서 앞서는 임수정이 낙승할 것이라는 예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죠. 다만 DEEP에서 레나가 미쿠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접전은 생각보다 맷집이 좋겠구나, 초반 KO승리는 안 나오겠다 정도까지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레나의 잠재력은 예상 이상이었습니다. 풀컨택트가라테 출신다운 돌진력, 반면 상대의 공격은 끊어주는 앞차기의 적절한 활용과 슛복싱 특유의 상대 펀치에 따라붙는 움직임으로 임수정의 공격 흐름을 완전히 끊어버렸습니다. 어찌 보면 약간은 더티해보일 수도 있는 레나의 변칙 스타일에 말려든 임수정은 클린치 상태에서의 맞씨름에 힘을 쏟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3라운드가 되어서야 겨우 페이스를 되찾을 수 있었죠.

일단 저력을 되찾은 임수정은 역시 대단했습니다. 레나의 변칙 스타일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힘으로 눌러버린 후에 특기인 펀치 러시로 레나를 몰아붙였습니다. 3라운드까지 종료된 후 판정 결과는 30-29(레나), 30-30, 30-30으로 오히려 레나가 우세한 무승부로 가슴을 쓸어내리게도 했지만, 이어진 연장전에서는 완벽하게 레나를 압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죠. 레나의 끈질긴 반격에서 뿜어져나온 투지가 부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요. 첫 부심은 임수정의 손을 들어줬지만, 두번째 부심은 레나의 승리를 판정했습니다. 조마조마한 순간, 마지막 부심의 판정 결과는 임수정의 승리! 2-1 스플릿 판정승, 그야말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겨운 승리였습니다.
 

레나 선수는 마지막 순간에 자기 이름이 불리길 얼마나 갈망했던지, 임수정 선수의 코너인 '레드'가 불리는데도 순간적으로 자신이 이긴 것으로 착각하고 기뻐하다가 황망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그 모습을 보고 달래던 임수정도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더군요.


어쨌든 17년째를 맞는 K-1 히스토리에 처음으로 여성 선수로서 승리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는 장본인은 우리나라의 임수정 선수가 됐습니다. 이번 경기에서는 오랜 휴식과 부상, 상대 선수의 낯선 스타일 등으로 꽤 고전을 했습니다만, 앞으로 더 큰 무대에서 보다 화끈하고 보다 완성된 스타일로 세계 격투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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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류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