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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인식되기를


“수박은 손으로 하는 무술이며 택견은 발로 하는 무술이다.”


라고들 생각합니다. 이번 편에서는 수박과 택견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를 기록과 상황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수박이 변천해서 택견이 되었다고 봅니다. 택견이 수박과 연결된다고 보는 이유는 문헌 때문입니다. 수많은 무술가들의 일화가 있지만 최영의 총재의 무력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기록이 주는 신뢰성 때문이지요. 이처럼 기록은 매우 중요한데 재물보에 [과거의 수박이 오늘날의 택견] 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그렇게 믿을 수 밖에요.


또한 수박은 기록에는 굉장히 많이 등장하지만 수박희, 수박 경기 등의 구체적인 규칙은 전하지 않습니다. 수박은 딱히 경기에 대한 규칙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 체술을 단련하던 사람들의 종합격투식 힘겨루기였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렇게 되면 서로 심한 상처를 입기 때문에 규칙 없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맨주먹으로 안면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UFC에서 주먹 골절을 염려해 선수들이 2회 대회부터 알아서 글러브를 끼고 나온 것처럼 수박경기의 경기자들도 그 정도는 알아서 조절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그냥 거의 적당한 수준에서 겨루는 자유 겨루기 형식이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얼굴을 주먹으로 정통으로 맞아 상하는 놈이 바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을 수도 있고요.


실제로 극진 공수도의 창시자인 최영의 총재가 직접 지도하던 대산도장(大山道場)에서는 쿠미테(겨루기, 대련)는 안면타격이 금지였지만 1,2대 제자들은 도장에서 안면타격을 연습했으며 맞는 사람이 바보다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군요.(대산도장의 수련을 경험한 로야마 하츠오 관장의 극진관 수련생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코뼈나 안면이 상할 정도로 타격을 가하지는 않았겠죠. 수박도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수박을 통해서 군사를 뽑기도 했다고 하며 인적 자원을 그렇게 망가뜨리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수박은 손수자(手)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 수박은 손기술 위주의 무술이며 택견은 발기술 위주의 무술인 전통무예의 양대 축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택견에는 손기술도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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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살을 쥐어뜯는 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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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의 혈 누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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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의 급소에 주먹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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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관절을 꺾는 낚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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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꿈치, 어깨로 치는 몸통박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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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로 배를 공격하는 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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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으로 얼굴을 공격하는 싸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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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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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을 공격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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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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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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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으로 가슴팍을 치는 벽치기.

출처는 인터넷 검색 및 [한풀 홈페이지]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수박이 변천해서 택견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한데요. 한번 기록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다음은 [중세 조선의 권법] 이라는 글의 발췌입니다. 원작자는 [조희승] 씨이며 제가 본 것은 직접 글을 본 것이 아니라 [택견연구 개정판](이용복 저)에서 자료로 첨부된 것을 읽고 올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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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수박 기록


고려군대의 매 부대마다는 수박을 특별히 잘하는 패가 따로 있었는데 두경승이 공학군에 배속된 다음 수박을 하는 자의 초청으로 수박대오에 들어갔다는 기록(고려사 권 100 열전 두경승편)


고려시기의 수박경기는 대체로 1대1의 원칙에서 승자전으로 진행하였는데 몇 명을 거꾸러뜨렸는가에 따라 이긴 자에게 상으로 여러 가지 물품을 차등 있게 주거나 무관 벼슬을 주기도 하였다.(고려사 권 12 세가, 예종원년 7월 개축; 고려사절요 권 14 의종 5년 9월)


의종 말년의 보현원에서의 수박경기, 무신정권시기 도방 3번 6번들의 수박경기, 송나라 사람들과의 수박경기의 기록.


이자겸의 정변이 일어났을 때 낭장 이적선이 왕을 부축하여 가는 지석숭을 왕에게서 떼내려고 그의 가슴을 발길로 찼다는 것과 고려시기 반역자 홍다구의 애비 홍복원이 장사들의 발길질에 의해 즉사한 사실


한희유와 위득유의 싸움에서 무관 위득유가 무술에 능한 한희유의 가슴을 두번이나 들이받았는데 희유는 주먹질로 가까스로 득유의 공격을 물리쳤다(고려사 권 104 열전 김방경)


** 이 기록의 경우 [수박] 이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을 조희승씨가 현대적으로 [무술] 이라고 적었는지 아니면 기록 자체에 [무술] 이라고 되어있는지 불분명합니다. 원문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수박 기록.


방패군의 시험은 수박경기에서 승자전으로 3명 이긴 자를 합격으로 쳤으며(태종실록 권 19 10년 1월 무자) 방패군보다 한층 높은 갑사시험은 먼저 무사들에게 말 타고 활쏘기, 달리면서 활쏘기에 합격한 자를 갑사로 보충하고 여기에서 낙제한 사람이라 해도 수박경기에서 3명 이상을 이긴 자는 합격으로 쳤다(태종실록 권 21 11년 기해)


사적 윤인부가 수박을 잘 씀으로써 호군벼슬(정 4품)을 받음


1419년에는 특별히 고른 50여명의 수박명수들을 모아놓고 경희루 밑에서 경기를 벌이게 해 한유는 4명을 이기고 갑사 최중기는 6명을 이겨 각기 상을 받았고 심지어 8명의 장사를 쳐 이기는 명수도 나타났다(세종실록 권 4 원년 6월 계사, 7월 갑진)


전라도 담양에서 시골 아전들과 관청 종들이 무리로 모아 큰 수박경기를 벌였다는 기록(세조실록 권 9 3년 9월 정축)


종들의 뛰어난 수박재주는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큰 수박경기대회에서 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우수하며 아주 훌륭하였다.(세조실록 권 42 13년 5월 신미)


1453년 함길도의 유생 신경례가 길에서 사나운 범을 만났을 때 주저함이 없이 달려들어 범 허리를 잡고 대가리를 향해 발길질을 드세게 한 사실(노산군일기 권 7 원년 7월 신미)


1462년 당시 장사로 알려졌던 한봉련이 무사인 겸사복 마홍귀와의 싸움에서 발길질로 심한 부상을 입힌 이야기(세조실록 권 25, 7년 8월 경오)


중 죽림이 같은 중인 희욱을 둘러메친 다름 발길로 힘껏 양 옆구리를 차서 죽게 만든 사실(성종실록 권 88, 9년 4월 기묘)


어우야담, 금계필담의 수박을 겨루는 장면이 상세히 적힘


갑사 이병식이 악질 중을 단번의 주먹질과 발길질로 즉사시키고 또 죽은 중의 복수를 위해 이병식을 찾아온 다른 중을 낭떠러지에서 날랜 발길질로 떨어뜨리려고 한 사실, 병사 우하형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소년 장사가 목숨을 내대고 겨룰 때 바른쪽 소년은 드센 발길질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왼쪽 소년장사는 상대방의 공격을 몸을 날려 가볍게 피하였으며 골이 난 바른쪽 소년이 두 주먹을 휘두르며 뛰어들자 왼쪽 소년장사는 두어 길 뛰어오르면서 상단 및 하단 차기를 한 다음 두 손으로 바른쪽 소년을 들어 땅에 메친 이야기, 16세기 신옹담이 8마리의 소를 가지런히 놓고 뛰어넘었는데 마지막 소는 발길로 차서 즉사시킴


*태종실록 권 32, 16년 병자 이에 앞서 윤인부는 갑사 및 방패군과의 국가적 수박 경기에서 이름을 날리어 상으로 쌀과 콩을 각각 5섬씩 받았다(태종실록 권 32, 16년 8월 임술)


이성호(1681~1763)는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유선 권 5의 무예십팔반을 설명하면서 열여덟을 백타라고 하는데 백타란 도수로 서로 칠래기를 하는 것이며 민간에서는 이것을 권법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16~17세기부터 수박을 권법이라고 부르기 시작 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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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기록을 보시면 수박에 대한 것이 매우 다양하게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박의 경우는 손을 섞어 싸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손을 섞는다.] 는 결국 힘을 겨룬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손으로 하는 무술] 이라는 해석보다 더 맞다고 보입니다.


조선 전기, 중기만 해도 수박은 매우 보편적인 기예였다고 보이며 이 수박은 택견과는 달리 지방에서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호의 기록으로 볼 때 16~17세기부터 수박이라는 이름 대신 권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듯 보이고 이 시기는 바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국방에 대해 굉장한 신경을 기울일 때입니다. 무예제보 번역 속집에도 [권법] 이 나오죠. 그리고 이후 기록에는 수박이라고 하는 용어를 볼 수가 없습니다.(혹시 있을지도 모르죠...다만 저는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때 아마도 군사무예로서 맨손무예가 [권법] 으로 채용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발달된 중국의 병법과 무기술(원앙진, 장도, 낭선, 월도, 곤방 등)을 받아들이면서 맨손무예 역시 수박이 아닌 권법으로 대체한 듯 보이고 이러한 것이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설 자리를 잃은 수박은 민간으로 그 기법이 이어지게 되어 탁견이 되었고 그 중 서울 지역에서 발을 주로 차는 방식으로 유희화 된 것이 결련택견이 아닐까 하네요.


물론 중국에서 가져온 [권법] 이 군영에서 수련되었더라도 여전히 수박, 탁견을 하긴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송덕기 할아버지의 증언으로는 민간뿐 아니라 별기군도 택견을 했다고 하며 또한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서 예도에 대한 설명을 보아도


“중국에 전해진 조선세법을 제외하고도 군영에서 따로 하던 예도가 있어 예도의 형태가 두형태가 되니 중국에서 되가져온 조선세법을 먼저 싣고 그 뒤에 조선 군영에서 하던 예도 역시 묶어서 총보로 따로 엮어 군영에서 두 가지를 함께 수련하도록 하라.”


라고 했으니까요. 중국에서 되가져온 것은 되가져온 것이고 조선 군영에서 하던 것도 배제하지 않는 치밀함, 그리고 군영에서 자생적으로 하던 우리 예도 기법이 있던 것으로 보아 중국의 [권법] 이 들어왔다고 해서 있던 수박, 탁견을 다 없애버리고 [권법] 만 하진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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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의 [권법]
출처는 [푸른깨비의 전통무예연구소]



사대주의 및 실용적인 측면에서 중국의 맨손무예와 그 명칭인 [권법]을 받아들였지만 예도처럼 수박, 탁견 역시 여전히 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송도수박이라는 무술이 요즘 새로 모습을 보였는데 송도수박은 평안도의 수밝기나 전라도의 태격, 육태안 선생의 수벽치기처럼 개인, 지방에서의 수박 기술이 모여진 것으로 보이고 이도 역시 계승 역사가 확실하다면 수박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수박이 서울지방에서는 탁견, 경기인 결련택견으로 점점 변천한 것에 비해 지방에서는 수박의 기법들이 변천하지 않고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방에는 택견 경기가 없었다는 것과 택견이라는 용어가 없다는 것을 볼 때 수벽, 수벽타, 등의 이름으로 수박의 기법이 택견으로 변천을 하지 않고 남아있었을 수 있다는 생각도 역시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기록이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택견도 수박에 뿌리를 두며 수박이 서울지방에서 점점 변천하여 택견이 된 것 역시 거의 확실해 보이며......수박의 기록에도 툭하면 발길질로 차는 모습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지역에서 수박이라는 기예가 수밝기, 송도수박, 수벽치기, 태격 등으로 이어졌다면 서울에서는 수박이 택견으로 이어졌다고 보아야 할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수박은 손으로 하며 택견은 발로 하는 무술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구분이 아니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수박이라는 기법이 시대를 흘러 서울지방에서 변천하여 [탁견] [비각술] [각희] 로 많이 비추어진 것으로 보이니...(택견 코리아에 소개된 [택견의 어원] 참조) 구한말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우리에게 인식된


“수박은 손으로 하는 무술, 택견은 발로 하는 무술”


이라는 분류도 역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가라데와 태권도가 유사해보이지만 경기의 방법이나 주로 사용하는 기법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결국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보자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정도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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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gp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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